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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M.Div학교3기]팀프로젝트1조:양극화(신영태,김은지,서기원,손동혁,이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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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24-05-02 16:54 / 조회 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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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 가득한 양극화 문제(정치, 지역, 남녀)를 어떻게 목회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조장: 신영태

조원: 김은지, 서기원, 손동혁, 이형빈


1. 문제의 제기

한국사회에 가득한 양극화 문제(정치,지역,남녀)를 어떻게 목회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양극화 현상으로나라 전체가 혼란스럽다. 특별히 정치적인 영역에 있어서 양극화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는데, 교회의 회중도 둘로 나누어져 있어서 목사가 현 상황에 대해서 무엇이라도 말을 꺼내면, 어느 쪽에서든 곧바로 반발한다. 그래서 ‘정치에 대한 설교’는 너무 위험하다.

(1) 그렇다면, 교회는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천국’만 설교해도 되는 걸까? (2) ‘아무와도 연관되지 않은 방식으로’ 천연덕스럽게 ‘설교만’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래도 되는 걸까?

사실 아무 말도 안하면 너무 쉽고 편하다.
그냥 ‘기도하자’라고 한다던지, ‘정치는 우리와 상관없는 더러운 영역’이라고 비난하면 끝이다. 하지만 무언가 말하려 하면 모든 게 너무 어렵다. 연구, 기도,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양쪽 모두에게 ‘ 비난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여야, 좌우라는 양측을 비난하면서도 결국 ‘그러면 무엇이어야 하는 지’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이념을 성경보다 더 신뢰하는 ‘우상숭배’

1)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
(1) 무관심 : 정치는 신앙과 별개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것(공사이원론, 성속이원론)
→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지 않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이분법은 틀렸다.
우리 자신과 이웃의 안전, 복지가 사실상 ‘정치’에 의해 좌우되는데,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내 삶와 내 이웃의 삶에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2) 정치과잉 : 정치에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것
기대가 크면 클 수록 정치적으로 더욱 예민하고, 극단적이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이 지나치면, ‘우상숭배’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 공간에만 들어서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믿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똑같이 난폭해지고 폭력적인 언어들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게 된다. 자신이 ‘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한체, 말씀이 온데간데 없어진다. 자신의 진영의 잘못에는 눈을 감고, 다른 진영의 잘못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켠다.

얼토당토않은 프레임을 씌운다던지,
모욕적인 호칭을 난발한다.(틀딱, 빨갱이, 토착왜구 등등)

하지만, 상대를 그렇게 부르는 순간 상대에 대해 이해할 마음이나 연민은 사라진다. 그들은 ‘그것’이 되고,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제거해야하는 ‘무엇’이 된다.


3. 왜 이런 양극화가 일어날까?

1) 성속이원론/ 공사이원론
낸시피어시는 완전한 진리에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성속이원론’, ‘공사이원론’에 빠져있음을 주장한다. 거룩한것과 세속적인 것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게 되면서, 복음은 ‘거룩한 영역’에만 남게 되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면서 ‘복음’은 사적인 영역에서만 유효하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공적인 영역에서 복음을 드러낸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복음은 사적인 영역, 즉 주일에 나의 신앙에 관해서만 존재할 뿐이지, 공적인 영역(정치, 경제, 직장, 사업장 등등)에서는 영향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복음을 ‘내 영혼에 관한 진리’로 축소시키게 되었고, 양극화가 일어나는 지점에서 어떻게 고민해야하는 지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2) 알고리즘
소셜딜레마(The social dilemma)에는 오늘날 SNS상에서 해당 플랫폼의 체류시간을 증가시키기 위해, 알고리즘에 기반한 컨텐츠 추천방식을 사용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컨텐츠 소비자의 디지털 족적을 추적하여,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을 맞춤으로 제공해준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굉장히 위험하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 등등의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나와서, 오늘날의 SNS가 갖고 있는 위험성을 고발한다.

실제로 유튜브에서는 유튜브 광고 수익으로 기업이익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컨텐츠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커다란 관심이 없다. 단지, 컨텐츠 소비자가 좋아할만한 영상인지, 아닌지만을 신경쓸 뿐이다. 그래서 더 자극적인 내용들을 제공함을 통해서 유튜브라는 플랫폼의 체류시간을 늘려나가고 있는데, 2010년도, 2020 년도의 미국 사회의 정치적 견해를 분석한 표를 보면 유튜브를 많이 시청할수록 중도적인 정치적 성향이 사라지고, 양극화로 나아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알고리즘 방식
CBF(contents based filtering) : 기존에 내가 선호했던 컨텐츠 기반 추천 CF(Collaborative filtering) :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용자들이 선호했던 컨텐츠 추천 HF(Hybrid filtering) : 어느정도 CBF이 쌓이면 + CF방식을 사용

# 유사성의 폐쇄성
하지만 이러한 알고리즘은 개인의 관심사, 관심사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자료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정보에 대한 폐쇄성을 기르게 된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성향’ 자체에 자신을 가두게 하여 새로운 발견, 가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이러한 ‘ 동조’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 반향실 효과: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만 소통을 함으로써 획일적 견해로 수렴하는 현상

- 필터버블효과 : 자신의 성향에 맞는 정보만을 필터링해주는 소셜 미디어로 인해서 정보 편향이 증폭되는 현상

3) 과잉공감
우리 집단이 아닌 존재에 대한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느낌을 넘어서서 타집단을 이해하려는 이성적, 의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정서적 공감은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현이지만
의식적 공감은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고, 생각하고, 배려하는 능력이다.

보통 공감은 우리에게 좋은 의미를 가져다주지만, 내집단 구성원에 대한 과잉공감은 ‘우리’와 ‘그들’을 구별하고, 차별, 갈취가 자연스럽게 만든다. 이를 내집단 선호성(ingroup favoritism)이라고 부른다. 자기 집단에 대한 과잉공감을 보인 사람들은 상대 진영에 있는 사람들을 ‘비인간화(dehumanization)’을 함으로써, 자기 집단의 분노에 극도로 공감한다. 외집단에 속한 사람을 ‘인간 이하’로 부르기 시작하고, 그들을 압박한다.

# INFORDEMIC, EMODEMIC
인포데믹은 잘못된 정보나 가짜 뉴스가 미디어를 통해 마치 전염병처럼 급속하게 퍼지는 현상을 말한다. 코로나 기간 동안 우리는 이러한 예들을 굉장히 많이 보게 되었다. ‘소금물로 입안을 소독하면, 코로나19에 걸리지 않는다’라는 잘못된 정보가 확산되었고, 이를 믿었던 어떤 교회는 집단 감염의 재앙을 맞았다. 마스크 필터 재료와 화장지의 재료가 동일하여 화장지가 곧 동날 것이라는 거짓 뉴스가 확산되어, 전 세꼐의 대형마트가 사재기 전쟁터가 되곤 하였다.

인포데믹은 이모데믹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부정적인 감정의 전염이다. 사회 심리학 연구를 보면 전염병의 위협이 증가할 때, 노인, 외국인, 심지어 비만인 사람에 대한 혐오감이 늘어난다. 위협이 있을 때, 소수자에 대한 경멸과 혐오가 급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가짜뉴스로부터 자유한가? 아이러니하게 기도를 열심히하는 순수한 사람들을 통해서 가짜뉴스가 유통되는 일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하게 된다. 평소에는 반 기독교적인 위협들을 주로 유통하다가, 종종 정치적인 견해가 섞인 이야기들이 유통될 때가 있다. 한겨레신문은 에스더기도운동을 통해서, 무슬림 혐오, 난민혐오에 대한 이야기들을 확산되었음을 문제제기하였고, 이 기사로 인해서 소송을 당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한겨레 신문이 승소하였다.

결국 우리는 구심력이 증가하면서 내집단 편애, 타집단에 대한 혐오를 서슴지않게 내뱉게 되었고, 공감의 원심력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다.


4. 해결

1) 말씀을 통한 설득
평촌새순교회 고성제 목사는 ‘정치공간에 그리스도인으로 서기’라는 책을 출간하여 목회자로서 어떻게 정치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가고 기준을 제시할 것인지를 이야기하였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진리이기에 양극화되고, 분열된 성도들의 마음의 회복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할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먼저 과도하게 정치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우상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정치공간에 들어갔을 때에 보여지는 극단적인 감정들을 살피고 있다.

창조-타락-구속의 기독교세계관 관점을 통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말한다.

2) 폭이 넓은 북쉐어링
인지적 공감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깊은 사유, 통찰, 고민이 필요하다.
각자의 교회는 설교 이외에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고, 나눔을 통해서 나와 다른 지점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3) 가짜뉴스에 대한 팩트체크
김동문 선교사의 책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라는 책은 무슬림들을 향한 가짜 뉴스의 팩트를 체크하여 문제를 제기 하고 있다.
각자의 교회가 이러한 팩트체크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면, 제3의기관을 설립하여 지속적인 컨텐츠 제작하여 가짜뉴스에 대한 지속적인 설득의 작업이 필요하다.

4) 설득과 함께 관계로
이스라엘에서 사역을 하시던 윤영천 목사님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갈등에 대한 상황들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K-POP을 통한 한국문화사역을 할 때, 민족적 갈등이 가득했던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고, 하나가되는 모습들을 보았음을 이야기해주셨다. 마주보고 대화하고 설득하는 방법도 필요하겠지만, 제3의 길 우리의 같음을 공유할 수 있는 활동들을 자연스럽게 펼쳐가는 것이 양극화의 길을 해소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 아닐까 싶다. 각 교회 내에 지역적 갈등, 정치적 갈등의 요소가 산재해있을 수 있지만 교회 내에서 동호회 활동, 친환경 사역, Fresh Expressions사역들을 펼쳐나간다면 친밀한 관계를 통하여 하나됨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 같다.

5) 플랫폼의 변화
위에서 기술하였듯이, 유튜브 내의 알고리즘은 양극화를 강화시킨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성도들에게 유튜브의 길을 가장 먼저 열어준 주체가 교회다. 비대면예배 시절에 하나의 해결책이었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사용한 플랫폼이 양날이 칼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플랫폼을 개발, 이용하여 유튜브의 알고리즘의 영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예) 온누리교회에서 런칭한 퐁당(Fondant)


*[부록]

[정치공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서기 / 창조-타락-구속 요약]
(1) 갈등하는 사회를 향한 ‘창조의 함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인식은 나와 다른 진영에 있는 사람을 향한 폭력을 잠재울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창조를 통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거역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거역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는 ‘불안정한 자유’를 ‘두루 따뜻한 애정’의 눈으로 봐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 내맘 같지 않아도,
그래도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봐주시는 시선이 창조의 내용이 함의되어있다.

이러한 따스한 시선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라는 말씀으로 연결된다.

(2) 타락한 현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죄의 본질을 바라보게 된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내 느낌, 내 생각에 좋을 대로 주장하면서 사는 것이 ‘자기중심성(i-cen- teredness)’다.

(A) 우상숭배
이러한 타락의 양상은 우리 삶의 전반에 ‘왜곡’을 가져온다.

종종 자기중심적인 정치적 경향성은 ‘정치공간을 만신전(Pantheon)’으로 만들게 된다.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당선이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자본주의도 한계가 있고 공산주의도 한계가 있다.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 교수(70년대 노벨 경제학상)

자본주의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지만 공산주의에서는 그 거꾸로다.
Under Capitalism, man exploits man. Communism, it’s just the opposite.

이 말은 공산주의가 인간을 거꾸로 존중한다는 뜻이 아니다. 거기서도 사람이 사람을 수탈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man exploits man 은 거꾸로 해도 Man exploits man 이다.

(B) 책임전가
타락의 또 다른 현상은 ‘책임전가’다.
타락 아래의 인간은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기보다 끝없이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아담이 하와에게 그랬듯이
우파는 좌파를 탓하고, 좌파는 우파를 탓한다.
현 정권은 전 정권을, 전 정권은 현 정권을 탓한다.
마르크스 레닌 계열 좌파는 이 세상의 불공평함을 부자들, 대기업들 탓을한다.

결국 책임전가는 상대를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보게끔 만들고, 전쟁모드의 우리는 상대방을 향하여 힘껏 험한 말을 내던지게 만든다.


5. 누가 나의 편인가?

우리는 정치적인 양분화 속에서 누가 나의 이웃인지를 찾으려할 때가 있다.
하지만, 누가복음 10장에서,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제사장, 레위인을 비유속에 등장시키지만, 사실은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사람 중에는 이웃과 이웃이 아닌 사람이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과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너희는 가서 곤경당한 자들에게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회적 약자를 도우라는 적용점을 설교할 때, ‘좌파인가?’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
하지만 성경과 마르크스-레닌 계열의 사회주의는 완전히 다르다.
성경은 사회적 약자를 돌볼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극단의 사회주의는 따듯한 보듬기보다 오히려 ‘심한 분열과 갈등’을 초래한다. 사회주의의 운동에너지는 ‘유산자’, 즉 자본가와 많이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다. 세상을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2개의 계급으로 나눈다. 반대로 자유주의에도 한계는 있다.

자유는 여건을 갖춘 자들에게나 주어지지, 그렇지 못한 상황 속의 사람에게 자유란 ‘소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사회적 약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는 marginal people이다. 여백에서 사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에 공감하며 치유해야 한다.

(3) 구속 : 이데올로기에 물든 청중을 어떻게 설득할까? 말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자원을 얻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지역에서,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에 따라서 각자 서있는 자리가 다를 수 있지만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가 ‘ 하나님의 뜻’과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알아서, 자신을 살펴가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어느 한 정당에 과도한 기대를 해서는 안됀다. 정당에 소속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정당에 몸을 담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변질할 때 그들을 비판하는 양심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레위기의 말씀으로
고성제 목사는 모세오경의 핵심인 레위기를 통해서, 시내산 언약에 집중할 것을 이야기한다. 레위기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바르게 설정할 수 있다.

레1-16장 : 제사제도 /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체 혹은 하나님, 이웃에게 범죄했을 때에 이를 어떻게 처리하고 회복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
레17-27장 : 출애굽 구원을 경험한 귿르이 공동체 내에서 서로 어떤 태도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
거룩함 / 사랑 / 공의와 정의

1) 그들은 엄청난 구원을 경험하였으나
2) 아직도 매일 주님의 용서가 필요한 존재다.

이것을 솔직하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자들은
스스로가 어떤 정치가가 되어야 하며,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하고 어떤 정치적인 기준점을 가져야할 지를 생각하게끔 한다.

나는 항상 ‘옳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고
너는 항상 ‘틀렸다’라고 말할 수도 없음을 깨닫기에
우리는 겸손한 마음과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성숙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7. 샬롬

샬롬은 그저 땅을 소유하면 당연스럽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구축함으로써 누리게 된다.

아모스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 지어다

아모스의 말씀을 대조해보면
하나님께서 그 땅에 흐르게 할 것이라던 젖과 꿀은 사실상 공의와 정의였고, 그것의 다른 말은 샬롬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여 ‘샬롬을 이루는 대안사회’를 이루어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이데올로기의 세례를 받아서는 안되고, 말씀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8. 우상의 개념 재정립하기
레26: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여호와임이니라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도, 나는 우상숭배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왜냐하면, 우상에 대한 정의를 잘못 내렸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정의1 :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
우리는 우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 정도로 정의를 내린다. )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없으면 나에게 우상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다.) 또한 이러한 정의는 하나님을 왠지 고약한 분으로 생각하게 하고 그리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까지 가세하면, 더 형편없는 분처럼 여기게 된다.

올바른 정의
1. 레위기 26장의 컨텍스트
레위기 26장의 말씀에서 나오는 ‘우상’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했을까?

개인과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 그해의 생산과 수확, 전쟁에서의 승리 등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주요하고 근본적인 것들을’ 그것에게 의탁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2. 우상숭배의 개념
그러니 우상숭배에서 문제가 되는 ‘본질적인 요소’는 그들이 그것들 앞에서 종교행위를 한다기보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대해야할 것을 그것들에게 의탁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것들이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어떤 대상/예:대학)에 달려있다고 믿는 순간, 그 우상이 우리 삶에

중심에 오게되고, 이후 모든 것은 그것을 중심으로 재배열되고 지배당하게 된다. (재구성)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우리 삶에서 근본적인 것들, 안전과 번영과 만족이나 삶의 의메에 관해 의지하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내게 무엇이 있으면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가?”나는 무엇이 상실될 때 가장 불안해하는가?)
“ 내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보다, 그게 있으면 더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가?”
“무언가를 결정할 때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강하게 나를 속박하여, 그 말씀의 뜻과 다른 선택과 결정을 하게 하는 무엇이 있는가?”

3. 이데올로기가 우상이 될 때
현대의 많은 우상들 중에 하나는 ‘이데올로기, 정치’다.
그들은 우상에 너무 깊이 빠져있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차분하게 듣지 못한다.
- 그 사람의 말을 충실히 듣고 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나?
- 그 사람의 말을 듣다말고, 이 사람 우측/좌측 아냐?라는 생각부터 먼저 하는가?
- 그 사람의 말을 깊이 듣고 옳고, 그름을 공감하며 이해하기보다 우선 마음과 귀를 닫고, ‘이 사람, 어느 진영의 사람인가?’를 먼저 알려고 하지 않는가?
- 인터넷에서 어떤 글을 읽을 때, 그 글쓴이의 진영을 알게 되면 그 말이나 글을 듣고 볼 필요도 없이 그냥 ‘제목하나’만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이데올로기’를 우상숭배하고 있는 중이다.
먼저 교회부터 우상을 몰아내고, 하나님만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그 질서에 대해서 더 중요하게 여기며, 자주 말해야 하고, 성도들이 그 질서로 세워지는 공동체를 교회 안에서 경험해야 한다.


참고문헌


1. 공감의 반경(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 장대익, 바다 2. 정치 공간에 그리스도인으로 서기, 고성제, 아르카
3.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김동문, 선율

영상
The social dilemma, Netflix


인터뷰
인터뷰 대상 : 윤영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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