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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송용원 목사님의 장로회신학대학교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교회상>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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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관리자 / 작성일20-03-25 15:33 / 조회 1,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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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어디서 났을까

"모든 것은 좋든 나쁘든 공동의 것"이라는 루터의 말이 요즘처럼 실감되는 시절도 없는 것 같다. 지금 전 세계인이 글로벌 바이러스 '코로나19' 사태로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체르노빌 시대에 못지 않은 "죽음의 현실성"을 공동으로 재발견하는 중이다. 이른바 100세 시대라고 하면서 죽음을 그저 남의 일로, 아니 먼 훗날의 일로만 여기던 대부분의 사람에게 죽음이 얼마든지 나와 내 가족의 일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이 공포와 함께 다가온다.
시인 T.S. 엘리엇이 1차 대전 후에 지은 시 『텅 빈 사람들』 마지막 구절이 이렇게도 지금 상황과 맞아 떨어지는 때도 없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종말을 맞이한다. 굉음을 내면서가 아니라 흐느끼며." (This is the way the world ends. Not with a bang but a whimper.) 그런 가운데 한국 교회는 주일 예배에 모이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지만 여전히 교회에 나가지 못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세계화로 모든 지역과 분야가 온통 연동되어 있는 지구촌이, 지속적 온난화와 원시림 파괴로 인해 드디어 예상치 못하던 '포스트 코로나 시대' 속으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인해 허물어지던 콘택트(contact, 대면접촉) 시대가 마침내 급격히 저물고, 주기적으로 찾아올 각종 바이러스에 대비하고 적응하며 형성될 언택트(untact, 비대면) 시대가 '새로운 표준'(New Normal)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에 따라 '흩어지는 교회'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주장이 터져나오면서 기존의 '모이는 교회'가 급속히 쇠락하면 어떡하나 하고 기독교계는 어깨가 천근 만근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본래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 기억을 더듬어 보면 관점이 다소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그 존재 자체를 뒤흔들 만큼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면 자신의 처음 시절을 되돌아보는 경향이 있다. 자기가 나고 자란 고향이나 처음 모였던 공간을 본능적으로 떠올리기 때문이리라)
우리 주님께서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면, 우리 한국 교회는 전염병이 퍼진 장안 길거리 한복판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쓴 『한국의 부름』(The Call of Korea)에 보면, 구한말 한양 도성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초기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이 병원을 설치하며 수많은 감염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고치다가 순직하기에 이르자 그 지극한 헌신에 정부 각료들 조차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마침내 전염병이 지나가자,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를 서양 귀신이라 조롱하며 교회 근처에도 오지 않던 "나라 안의 빈부 귀천 모든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주목을 받게 된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고백했다. "이러한 외국인이 우리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한국 교회에 계층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전염병 전이 아니라 그후였다. 이렇게 한국 교회는 전염병과 함께 본격적으로 모였던 셈이다. 그런데 오늘 교회는 전염병과 함께 흩어져 버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공동체로 모인다는 것

누가 뭐래도 모여야 교회다. 신약성서에는 교회란, 에클레시아, 즉 가시적 모임 혹은 회중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세상에 '고양이'라는 단어가 모든 골목 담벼락에 빼곡히 써 있다 해도, 정작 어느 곳을 가도 톰이든 네로든 단비든 실제 고양이가 단 한 마리도 없다면 고양이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이듯이, 이 땅에 '교회'란 말이 있어도 실제로 모인 교회들이 눈에 보이게 없다면 교회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만 내 이름으로 모여도 내가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혼자서는 교회가 될 수 없다. 교회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목사는 그리스도인이 신체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모일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늘 원수들 가운데 지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을 따라 세상 원수들 한가운데서 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에서나 누릴 수 있는 영적 호사를 미리 선취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지금도 감옥에 갇힌 자들,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 가난한 노인들, 집이 없는 노숙인들, 신앙의 자유가 없는 억압된 지역에 사는 이들, 전쟁으로 난민이 된 이들, 휴일도 없이 일터에 묶인 이들, 멀리 오지에서 봉사하는 이들은 사랑하는 형제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다.

반면에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편안하게 드리는 그리스도인이나, 여행과 레저를 즐기느라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공동체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은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도 확인했듯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물이다.

선물이 되어 준다는 것

본래 공동체를 뜻하는 community는 '함께'라는 com과 '선물'이라는 munus가 모인 말이다. 공동체란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주는 모임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서로 선물이 되어주는 모임일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공동 선물을 받아 서로 공유하는 유기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선물은 그의 소유 일부를 떼어 보내주신 선물이 아니라(그랬다면 굳이 가시적 공동체가 필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선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는 선물이 되고자 그리스도는 친히 몸으로 직접 이 땅에 오셨고, 친히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친히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리고 빵과 떡도 친히 떼어 주셨다.

선물을 건네 주는 분이 텔레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실재 현장에 오셔서 악수를 청하고 있다면, 선물을 받는 자도 마땅히 가상 공간이 아니라, 내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현장에 직접 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성육신의 교회는 언택트 공간이 될 수 없고, 컨택트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컨택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커넥트(connect)하는 공동체다. 사랑하는 관계라면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다. 사랑하는 연인과 수십 차례 통화하거나 문자를 나누는 것과 단 한번이라도 직접 만나는 것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까?
본회퍼 목사는 교회란 너와 내가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만나는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를 그리스도 안에서 접촉하고 만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너와 나 사이에 직접적으로 정신적 사랑을 꽃피우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적 사랑이 맺히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다른 곳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서 계시기 때문에, 나와 너는 반드시 그분을 사이에 두고 물리적으로 만나야 한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야 하는가

영국의 변증가 C.S. 루이스는 성부는 우리 앞에 계시고 성자는 우리 옆에 계시다면 성령은 우리 안 또는 뒤에 계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영적 실재가 이러 하기에 혹자가 말하듯, "우리 한국 교회는 앞으로는 주로 가상 공간에서 만나도 충분한 것 아닌가요? 아니면 아예 이렇게 된 것 그냥 가나안 교인으로 지내도 괜찮은 것 아닌가요?" 물으신다면 나는 그에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굳이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이유가 있을까요?
굳이 그대가 오늘도 가족이 있는 집으로 퇴근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 굳이 그 먼 나라까지 비싼 돈 들여가며 여행 갈 필요가 꼭 있을까요? 그냥 가상 공간으로 충분할 텐데요". TV화면만으로는 알프스의 싱그러운 꽃들을 보아도 그 향기 맡을 길 없고 시베리아의 휘청거리는 자작나무들을 보아도 정작 그 바람을 맞을 길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솔직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문제는 모이느냐, 흩어지느냐가 아니라 갈망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갈망하고 사랑해야만 몸소 찾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진실로 주님을 사랑했고 조선의 백성을 사랑했기에 전염병이 창궐한 사대문 안으로 직접 들어갔던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면 형제들끼리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주고자 반드시 모이게 되어 있다. 자신을 다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현존하는 모임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가서 우리는 서로를 인간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먼저 신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서로를 형제로 만난다. 하지만 본회퍼가 솔직하게 고백했듯이, 서로가 없다면 그리스도를 만날 길은 요원하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혼자 막연히 사색하는 것보다, 내 앞에 있는 형제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말로 고백하는 것이 훨씬 강력하기 때문이다.

C.S. 루이스 식으로 말하자면, 가시적 공동체로 모이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따로 계신다.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발생하는 영적 실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상적 반영이다. 형제1 앞에 있는 형제2 안에 성부께서 현존하시고, 형제1 옆에 있는 형제3 안에 성자께서 현존하시며, 형제1 뒤에 있는 형제4 안에는 성령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서로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온전한 하늘 사랑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 말씀과 공동 기도, 공동 찬송과 공동 성찬, 공동 고백과 공동 섬김을 통해, 이 땅에 그대로 비추는 신적 거울이 되는 사건을 가리켜 성경은 교회라고 말한다.

앞으로 갈수록 세상은 갈망과 무정, 소외와 불안, 단절과 배제로 치닫는 인간의 언택트 도성에서 힘든 씨름을 해야 한다면, 교회 공동체야말로 삼위일체적인 감사와 온유, 우애와 평안, 연대와 포용이 가득한 하나님의 컨택트 도성으로서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껴안는 날이 찾아오면

구약성서의 전도자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 3:1)고 말한다. 하여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미물도 범사 가운데 하나이니 물러나도록 정해진 기한이 있을 것이다. 그 옛적 제 아무리 터져 나오려 하고 끝도 없이 몰아치려 해도 하나님께서 원시 바다를 향해 꾸짖으시며, 너는 여기까지만 오고 더는 넘어오지 말고 여기서 멈추라며 금을 그으시고 문 빗장을 지르시니 꼼짝 없이 가두어진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처럼. 그러니 우리가 지금은 울 때이지만 곧 웃을 때가 올 것이다.
지금은 죽는 때이지만 곧 치료할 때가 올 것이다. 지금은 많은 것을 잃을 때이지만 머지 않아 다시 찾을 때가 올 것이다. 지금은 안는 일을 멀리 해야 하는 때이지만 머지 않아 다시 안을 수 있는 때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글로벌 신종 바이러스는 마치 전도서에 등장했던 바람처럼, 아니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를 모조리 흔들어놓고 떠나버렸던 흑사병처럼,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겠지만, 결국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신학자 틸리히의 말처럼,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시고, 우리가 바라지 않음에도 우리를 붙들고 있는 고독 속으로 밀어 넣으시는 분"이시다. 고독이 없이는 제기할 수 없는 진리와 자유와 창조의 문제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홀로 지내신 주님께도 결코 만만치 않았던 고독은, 그러나 영원한 현존이 되시는 하나님 손에 붙들리는 시간이 된다면, "홀로 있을지라도 외롭지 않은 경험"이 될 것이다.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사회에서 외로운 군중으로 인생을 마치지 않고 물리적 고립과 단절이라는 미증유의 경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홀로 서 있던 날이 적지 않았고, 함께 했던 날이 그립기만 하다. 얼마나 더 이러한 기간을 보내야 하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은 한국 교회가 그분의 삼위일체적 사랑에 참여하고 그것을 반영할 수 있는 공동체로 탈바꿈될 수 있을 것인지 '검증'하는 시간으로 이렇게 '홀로 있어야 하는 날들'을 일부러 두시는 지도 모르겠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함께 하는 날'만 은혜로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는 날'도 선물로 건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홀로 있는 날'과 '함께 있는 날' 사이에서 '주의 날'을 맞이하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새 언약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신학자 밀리오리는 오늘날처럼 포스트모더니즘, 다원주의, 고삐 풀린 소비주의의 강력한 원심력으로 진리, 개인, 공동체가 조각나버린 파편의 시대에 적절한 교회 모델은 '교제의 교회'(ecclesiology of communion)라고 말한다.

코로나19 이전에 한국교회는 소비주의, 개인주의, 기복주의, 번영 신앙에 물들어 꽃 길만 걷고 싶어하던 교회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코로나19 이후에 한국 교회는 약함, 착함, 주변성을 선택하며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코로나19가 심판의 고통이 아니라 재생의 진통이 되는 것은 지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다시 모인다 해도 예전처럼 너와 내가 만나는 '정신적 공동체'가 될 것 같으면 차라리 모이지 않고 흩어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코로나19 방학을 마치고 다시 등교하는 한국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영적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면 외적인 교세가 혹시 다소 꺾이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누룩으로서 갖는 권세는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코로나19는 (하나님과 교회와의 올바른 관계인) 영적 공동선의 철이 무뎌지지 않도록 (교회와 세상과의 올바른 관계인) 사회적 공동선의 철과 맞부딪히는 사건이다. "쇠붙이는 쇠붙이로 쳐야 날이 날카롭게 서듯이, 사람도 친구와 부대껴야 지혜가 예리해진다."(잠27:17)

톨스토이의 단편 『두 노인』은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난 잘 사는 예핌과 평범한 예리세이 중에서 누가 진정 '교제의 교회'이자 '섬기는 교회'였는지 알려준다. 예리세이는 도중에 전염병이 돌아 죽어가던 한 농가 식구를 회생시키느라 성지 순례를 포기하고 보살핀 후에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반면 손해라고는 일절 모르는 예핌은 자기 길만 잘 챙기며 예루살렘에 도착하지만 그리스도의 무덤을 보려는 군중에 밀려 맨 뒤 줄에 서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런데 저기 맨 앞 줄에 예리세이가 빛나는 모습으로 손을 들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정작 고향에 돌아온 예핌은 예리세이가 예루살렘에 가 본적도 없음을 알고서 충격을 받는다. 자기 친구는 영혼으로 그곳에 있었는데 정작 자신은 몸만 다녀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예리세이를 꼭 빼 닮은 초기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의 영적 사랑으로 태어난 공동체이다. 그러니 한국 교회는 더 이상 눈으로 사랑을 그리는 예배나, 입술로 사랑을 말하는 교제를 멈추어야 한다. 가난함도 부요함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주님과 함께 나누는 참 사랑의 교제, 나의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만남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아래의 책들을 참고하였습니다.

  1.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정지련, 손규태 옮김. 『신도들의 공동생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2. C.S. 루이스 지음. 이종태. 장경철 옮김. 『순전한 기독교』. 서울: 홍성사. 2001.
  3. Paul Tillich. 『The Eternal Now』. SMC Press. 1963.
  4. 다니엘 밀리오리 지음. 신옥수. 백충현 옮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5. 김인수 지음.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7.
  6. T. S. 엘리엇 지음. 『텅 빈 사람들(The Hollow Men)』. 1925.
  7.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톨스토이 단편선』. 서울: 인디북. 2003.


은혜와선물교회 송용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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